멀티미디어센터 4월 정기영화 상영

80에 가까운 나이에 50편에 가까운 작품들을 남긴 우디 앨런.

수십년을 고수해온 까만 뿔테 안경 너머에, 이제는 백발의 노인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그는 무언가에 홀린듯한 아이같이 천진난만한 표정을 가지고 있다. 죽음에 관하여 그가 가지고 있는 신념을 떠올려보면, 그는 그렇게 영원히 소년일 것만 같다. 땡그란 눈을 크게 뜨고서, 약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면서, 삶이 그에게 공처럼 던져주는 이야깃거리들을 열심히 관찰하고, 맛보고, 요리조리 주물러보고는 사람들에게 달려가 “오늘은 이런 굉장한 일이 있었어!”하며 수다스런 이야기를 펼쳐놓을 것 같은. 그런데 그 반짝거리는 재치가 가득한 그의 언어와 이야기 속에는 늘, 아이같지 않은 성숙한 통찰이, 삶에 대한 풍자와 해학이, 철학과 신념이 녹아있다.

 

april movie week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란 곳은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파우스트라는 위대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에도 무려 6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걸린, 일생에 단 하나의 인정받는 작품을 남기는 것도 어려운 곳이다. 그런 세상 속에서 우디 앨런은 자신의 신조에 따라 1년에 1편 꼴로 작품을 무한정 쏟아냈으니, 그 탓에 우린 소위 ‘걸작’이라 불리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그의 작품에서는 때때로 무언가가 결여된 느낌을 받을 수도, 어쩌면 공감하지 못하거나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기에 그의 작품은 바로 그만큼이나 인간적이다. 어딘가가 살짝 모자란 듯 하면서도 실망과 웃음, 바보스러움과 현자스러움을 적당하게 비율 맞춰 버무려놓고, 철학적인 주제는 미리 숙성시켜 작품 속에 재어놓았다가 자연스럽게 재료의 맛에 배어들게 하여 거부감을 주지 않는, 아주 친숙한 맛을 가진 영화들. 삶이든, 삶을 반영한 영화든 그 무엇이든 간에, 그 모든 일들이 ‘사람’이라는 불완전한 존재의 손 끝에서 만들어지는 일들이라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그렇게 그의 작품들은 때로는 간이 삼삼하고 때로는 간이 적당하게 딱 맞으며 때로는 놀라울 만큼 깊은 풍미의 맛을 선사한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들은 그런 인간의 불완전함으로 완전해진다. 그 자신도 그러하고, 그의 작품도 그러하며, 그 작품 속 캐릭터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나는 죽음에 절대적으로 반대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나은’ 이승에, 우리의 현실 속에 아주 긴밀하게 닿아있다. 그렇다고 그의 이야기가 죽음을 배척하거나 외면하거나 그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죽음의 두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고, 현실 속에서는 종종 죽음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느끼기 쉬운 우리의 경각심을 깨워 죽음을 코 앞에 데려다 놓거나, 죽음 앞에 심각해지는 우리 자신이나 죽음 그 자체를 우스꽝스럽게만들어버리기도 한다. 죽음이 싫다는 바로 그 생각이, 삶 그 자체에 대한 갈구와 갈망으로 이끌어 오롯이 “삶을 삶”과 “존재가 존재함”에 매료될 수 있게 한다. 이런 순수한 갈망은 가장 삶다운 삶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게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반대했던 그와 그의 이야기들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걸 넘어 초월해버린다.

 

우리는 죽음의 존재를 알고 또 받아들이기야 하지만, 언젠가는 지금 우리가 쩔쩔매고 마음을 쏟고 몸을 바쳐 견뎌내고 이뤄내고 살아내는 이 모든 게 한낱 재와 먼지로 되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에 허탈한 한숨을 입에 물고 무의미의 섬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어 두려움에 잠식당한 채로는 도무지 인생을 제대로 살아낼 수가 없을 것이다. 바로 그래서가 아니겠는가, 우리가 언젠간 죽을 걸 알면서도 죽을 힘을 다해 살아가는 것은. 언젠가는 이 모든 게 바람 속에 흩어져갈 게 분명하지만, 그 모든 것을 잊은 채 지금 이 순간의 삶을 기꺼이 누리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리고 그런 주어진 순간과 삶에의 충실이 지금의 인류가 가진 역사와 정신적 유산, 그리고 지금의 우리가 존재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것을 가장 깊은 의식 속의 우리는 어쩌면 알고 있다. 반면 그와 동시에 그런 허무와 무의미의 맥락은 우리가 지금 안고 있는 모든 심각한 부담과 짐으로부터의 자유를 허용하기도 한다. 그래, 언젠가 이 모든 게 사라져버릴 거라면, 심각함은 조금 내려놓고 이 고통조차 조금 즐겨보면 어때?

그렇게 우디의 영화 속 캐릭터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현실과 판타지, 실재와 가상, 의미와 무의미,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려지는 것을 경험한다. 한때는 확신과 자신에 차있던 그들의 선택은 늘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고, 가장 화려하고 매혹적이었던 것들이 가장 찌질한 어떤 것으로 변모하거나, 가장 우스꽝스럽고 터무니없는 일들이 예상치도 못한 달콤한 열매들을 가져오기도 하는 그런 묘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늘 무언가가 불안하고 서투른 그들은 그렇게 환상 속에 살다가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왔다가 다시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분 가지 않는 꿈과 사건들을 재창조하기를 반복한다. 그 가운데 끊임없이 상처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사랑한다. 살아간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당신이, 우리네 삶이 그러하듯이. 그래서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우디 앨런 바로 그 자신의 자화상이자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그런 까닭인가보다. 많은 이들이 우디 앨런의 이야기를 사랑하는 것은. 어린아이와도 같은 무구한 호기심으로 삶을 탐미하는 동시에, 오랜 세월 살아온 관록으로 상처와 눈물도 웃음과 재치로 녹여내 승화시키는 지혜가 담겨있는 그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바로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싶어하며 또 발견해낸다. 그렇게 자아와 세상 간의 소통과 공감을 통한 새로운 의미들의 축적을 가능하게 하는 그만의 독특한 연결고리, 바로 그것이 그가 영화를 좋아하고 끊임없이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걸고 싶어하는 이유이자, 우리가 그의 영화를 찾는 이유일 것이다.

학술정보원 동아리 “연시”

회장 백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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